Sung Taejin

성태진

Memory of Childhood, Not Long Gone, Not Long lost 展

2018.8.30-9.20

Fabrik gallery collaborated with 칼리파 갤러리 Khalifa gallery, 홍콩

태권V의 유쾌한 자력갱생 ● 드디어 우주는 평화를 찾았다. 그리고 예술가 성태진은 실업영
웅 태권V의 삶에 대해 고심하게 되었다. 태권V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성태진은 어린 시절
내내 태권V의 맹활약을 지켜보며 자랐다. 하루라도 거르면 입에 가시라도 돋을세라 거의 매
일 오후 6시대에는 고난을 극복해 가며 악당을 물리치는 현란한 태권V의 활약상을 손에 땀
을 쥐고 지켜봐야만했으며, 성태진의 키가 자라 갈수록 태권V는 성태진의 모든 생활 속 곳
곳에 파고들어 위풍당당한 영웅의 모습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성태
진의 노트와 책의 여백엔 예외 없이 태권V이가 빼곡하게 그려졌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다.
오늘 날 작가 성태진을 생각하면 누가 시키지도 않은 조기 영재교육을 스스로 노력해서 톡
톡히 받은 셈이랄까… 그리고 유년기를 벗어나던 어느 날 아무런 계기도 명백한 이유도 없
이 성태진은 그토록 선망하던 영웅 태권V를 까맣게 잊게 된다. 그렇게 싱겁게 헤어진 태권V
와 성태진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각자의 길을 걸었지만 결국 운명처럼 다시 만나게
된다. 성태진이 매우 장래가 보장될 대학의 공학과를 중도하차하고 미술대학에 들어가 4학
년이 될 때만해도 다시 태권V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는 문화를 낳고 만화는 만화세대를 낳았다. 6시 만화 kids였던 성태진이 영웅 태권V를
다시 떠올린 것은 미술 대학을 졸업한 이후다.
미대졸업과 동시에 고고한 예술 백수가 될 위기에 처한 성태진은 홍익대 근처에 미술학원을
열었다. 낮에는 그림을 그리고 밤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른바 ‘자력갱생’의 삶을 설계했
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미술학원은 친구들의 놀이터로 거듭났다. 낮 보다는 주로 밤에 활
동하던 그 무렵 성태진이 아랫배가 불룩하고 무릎이 불뚝 튀어나온 나이롱 츄리닝을 입은
백수 태권V를 마침내 운명처럼 다시 만나게 된다. 미술학원의 우울한 낭만이 매일 매일이
똑같은 반복으로 이어지던 어느 날, 잠에서 겨우 깨어난 성태진이 들여다본 거울 속에는 까
맣게 잊고 있던 유년의 영웅 태권V가 성태진을 마주보고 있었다. 다만 영웅의 모습은 간데
없고 초라하고 어설픈 청년 생활인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날 아침의 조우는 그렇게 유년의
깊은 우물에서 불쑥 튀어나온 위대한 영웅과, 화가가 되어 보겠다는 청운의 꿈을 이루기 위
해 IQ 150에 대한 부모님과 사회의 기대를 배신해 가면서 미술계에 입문했지만 결국 낮밤
이 바뀐 한낮 백수신세로 전락한 자신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순간이자 성태진의 작업에 중
요한 방점을 찍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우주에 평화가 찾아왔다. 태권V는 지구를 지키는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가족
도, 친구도 없던 그에겐 세상은 두려운 곳이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할 기회(?)의 땅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지구를 지키며, 우주의 악당들을 쳐부수고 승리의 V를 한번 날려주는
것이 전부였던 나의 영웅 태권V는 서서히 사회 구성원으로 적응을 하기 시작한다.(성태진)
● 그날 아침 거울을 통해 유년의 우물을 빠져나온 태권V는 마침내 성태진의 작업실에서
작가와 동거를 시작한다. 성태진은 태권V를 등에 업고”낙장불입”,”자력갱생”,”함께 있을 때
두려울 것이 없었다”,”오매불망”등 일련의 작품들을 제작한다. 작품 제목에서 보듯 태권V는
이제 더 이상 영웅이 아니라 때로는 순수하고 유머스럽고 천진하지만 우유부단하고 부조리
한 현대인의 가벼운 삶을 살아가는 생활인이다. 그림 속 태권V는 용맹한 기백을 뽐내는 대
신, 100cc 오토바이에 철가방을 싣고 자장면을 배달한다. 때로는 술에 취해 친구와 함께 어
깨동무를 하고 젊음의 슬픔을 토로하고, 때로는 그리운 누군가를 오매불망하며, 때로는 실연
도 당하고 때로는 갑옷을 갖춰 입은 무장한 채 비장한 모습으로 자력갱생을 다짐한다.’하고
싶은 일 다 하며 사는 로봇이 얼마나 되겠냐.’면서 말이다. ● 화가들이 작품을 통해 자신과
사회에 대해 거론하는 것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당연한 일이다. 성태진도 태권V를 내세
워 앞날이 불투명하기만 한 자신의 다소 심각한 현재를 표현하고 있지만 다만 표현의 방식
이 그간의 심각한 예술을 살짝 꼬집어 허를 찔러준다. “어차피 한번 하는 예술, 뭐 그리 심
각할게 있나… 재미있으면 그만이지~”라면서…
성태진은 자신의 작업에 이제는 한물 간 과거의 영웅 태권V라는 ‘누구나 알고 있는 문화적
코드’를 매우 적절하게 잘 활용하는 영리한 작가이다. 태권V가 가진 ‘유년의 추억’이라는 대
중적 공감대를 만화의 극단적인 평면성과 글과 그림이 함께 구성된 이야기구조를 활용해 작
가를 포함한 현 사회의 태권브이세대 영웅에 대한 꿈이 사라진 청년 백수의 무기력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내었다. ● 팔만대장경을 제작해 낸 조상의 후예답게 판화를 전공한 성태진의
작업방법 역시 매우 독특한 방법을 구사하고 있다. 성태진은 나무판에 그림과 글을 조각칼
로 파내고 그 위에 화려한 형광색과 원색들을 촌스럽거나 말거나 주저 없이 바로 채색해 작
품을 제작한다. 판화는 같은 작품을 여러 장 찍어내기 위해 나무에 조각을 하지만 성태진의
작업은 판화처럼 나무에 조각은 하지만 그 위에 바로 채색해 단 한 점의 작품으로 마감한
다.
“제가 배경에 글을 넣는 이유는 우리 조상들이 대장경을 새기면서 호국의 의지를 되새겼다
면 저는 판에 글자를 새기면서 개인적인 염원을 새기는 마음으로 작업을 합니다.” (성태진)
● 그림 뒤의 배경처럼 깔린 글씨들을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보면 또 한 번 허를 찔리는 미
소를 짓게 된다. 그 글은 ‘사랑은 아무나 하나’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와 같은 유행
가 가사이기도 하고 ‘달려라 하니’와 같은 만화영화 주제가이기도 하고 ‘한산 섬 달 밝은 밤
에 수루에 홀로 앉아… ‘와 같은 비장한 시조이기도하다. 그 글은 작품의 주제를 한층 선명
하게 풀어주는 ‘만화’ 속의 글과 같은 역할을 한다. 또한 “예술? 그림? 뭐, 별거 있어? 재미
있으면 그만이지~” 라는 유쾌한 재미주의자 성태진의 독백이면서 작가가 주장하는 재미즘
을 다시 한 번 강열하게 각인 시켜준다. ■ 이승미